배가 이미 불러 있을 때
기울이는 술잔은
그저 헛헛한 입을 달래는 헛배 부름일 뿐이다.
진산진미를 차려놓고 마시는 소주라 한들, 배부른 상태에서는 혀 끝에 감도는 알코올의 씁쓸함 외에는 아무런 감흥도 남지 않는다.
하지만 인생의 진짜 술맛은 가장 가난하고 마음이 비어 있을 때 찾아오는 법인가 보다.
지갑 속이 쓸쓸하게 비어버린 채, 허탈함과 자책감을 안고 털벅털벅 경마장 문을 걸어 나올 때가 있었다.
바람은 왜 그리 차갑고, 발걸음은 또 왜 그리 무거웠던지. 세상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은 기분으로 고개를 숙이고 걷던 그 길목에서 거짓말처럼 아는 형님과 형수님을 만났다.
형님 내외는 내 지갑 사정과 초라해진 마음을 다 안다는 듯,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근처 단골 국밥집으로 데려가셨다.
뚝배기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뜨끈한 국물,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툼한 머리고기 한 접시. 그리고 형님이 가득 채워주신 소주 한 잔.
"마셔라,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거지."
투박하지만 정 깊은 그 한마디와 함께 털어 넣은 소주 한 잔은 희한하게도 쓰지 않았다. 혀 끝을 감돌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술은 차가운 가슴을 단숨에 데워주는 따뜻한 약 같았다. 기름진 머리고기 한 점을 새우젓에 콕 찍어 입에 넣으니,
세상을 다 잃은 것 같았던 서러움이 순식간에 눈 녹듯 녹아내렸다.
풍족할 때 마시는 술은 술을 마시는 것이지만, 절망의 문턱에서 좋은 사람이 사주는 술은 ‘정(情)’을 마시는 것이었다.
세월이 흘러 지금도 가끔 입안이 쓸 때면 그날의 머리고기집과 소주 한 잔이 떠오른다.
내 인생에서 가장 맛있었던 술은 비싼 양주도, 배부를 때 먹던 안주도 아닌, 주머니 털털 털린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던 그 형님과 형수님이 건넨 머리고기 쇠주 한 잔이었다.